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신성(성)|신성]], [[건안성]] 전투 === >'''신성(新城), 건안(建安), [[주필산 전투|주필]](駐蹕)에서의 세 차례 큰 싸움에서 우리의 군대와 당나라의 병사 중에 전사자가 많았으며, 말들도 많이 죽었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만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위정(韋挺)은 개모성에 주둔할 것을 명 받았는데, (개모성은) 신성과 인접한 곳에 있어 온종일 전투소리가 들렸고, 이에 (그는) 두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구당서》''' 위정전(韋挺傳)}}} >...(중략)... 장손무기가 홀로 나서서 “[[당 태종|천자]]의 원정은 보통 장수들의 정벌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고구려군이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가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라 하였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 >[[이세적|세적]]이 처음에 요수(요하)를 건너올 때, 모든 장수들에게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경계를 지키는 성 가운데 최고의 요충지이다. 이 성을 먼저 도모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성은 함락시킬 수 없다'''"[* 666년 발발한 3차 고당전쟁 초기에 이세적이 남긴 발언이다. 645년 벌어진 신성 전투 패배의 기억이 당나라 지휘부에게 크게 각인되어있던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하}}}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자세히 기록되어있지는 않으나 《[[삼국사기]]》 에 신성과 건안성 전투가 언급된다. 위 기록에 언급된 것을 참고하면 이 두 전투 역시 양측 모두 주필산 전투에 버금갈 정도로 대군을 동원한 중요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구당서]]》 위정 열전에는 신성 바로 밑에 있는 [[개모성]]에 주둔하던 위정이 신성에서 들려오는 양군의 북 소리와 함성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군|당군]]이 안시성에서 [[고구려#s-7|고구려군]]에게 가로막혔을 때 [[안시성]]을 우회하여 [[오골성]]을 공격한 후 평양을 직공하자는 강하왕 이도종의 간언을 태종이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신성과 건안성에 주둔한 고구려의 10만 대군 때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두 전투에서 고구려는 성을 잘 지켜냈음을 알 수 있다. [[랴오허|요하]] 하류에 위치한 건안성 역시 영주도독 장검이 이끄는 이민족 부대의 공격과 [[비사성]]을 함락한 장량의 평양도행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평양도행군이 당나라 본군과 보조를 맞춰 고구려 영내로 진입하는것을 막아낸다. 645년 4월, 장검의 이민족 부대는 요하 하류에서 도하하여 건안성을 공격하여 고구려군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건안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장검의 군대는 건안성에서 고구려군 수천명을 죽이지만 이후의 기록이 사라진다. 이는 장검의 군대가 건안성에서 치명적인 대패를 당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치통감에는 645년 7월에는 장량의 평양도행군이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건안성의 고구려군에게 오히려 반격당하여 군사를 많이 잃고 가까스로 막아낸 기록이 있다. 이 전투들의 의의는 상당히 큰데 요동 방어선 북단의 최고 요충지 신성이 건재함에 따라 고구려는 [[신성#s-5|신성]]-[[남소성]]-[[국내성]]으로 이어지는 요하 상류에서 자유롭게 군사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상기된 것처럼 당군은 [[안시성]]-[[오골성]]-[[평양성]]으로 이루어지는 진군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건안성 역시 장량의 평양도행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요동 방어선이 구축된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전쟁을 끝내려는 고구려의 계획이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실제로 당나라 본대가 안시성 공략에 애를 먹는 8월 중순, 오골성을 먼저 공격하자는 고연수의 제안을 이세민이 수용하지 못한 이유가 신성과 건안성에 위치하며 당군의 진격로를 끊임없이 위협한 10만의 고구려군 때문이었음이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1차 고구려-당 전쟁의 성패는 '''여기서 결정이 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성이 식량 자원과 에너지원들의 보고여서 요동 방어선의 거점 지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평양으로의 어택땅을 하게 된 2차 전쟁과 달리 1차 전쟁과 3차 전쟁 모두 방어선의 핵심 지역을 떨어트리면서 남진하는 전략을 취했는데, 1차 전쟁 때는 신성을 떨어트리지 못해서 안시성에서 결국 제지 당했지만, 3차 전쟁 때는 요동 지역의 다른 성을 냅두고 무려 7개월 동안이나 신성 공략에 매달린 점 등을 볼 때 당나라가 1, 2차 전쟁의 패배 주요 원인 중 하나를 신성 함락 실패에서 찾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며, 다른 말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신성을 함락시켜야 한다고 그들 스스로가 생각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